260531 "퇴짜 맞고 왔습니다."
"퇴짜 맞고 왔습니다."
지난주에 첫째 눈이 빨개지더니 아이가 아프다고 했습니다. 한 이틀 지난 일이었는데 병원에 가고 싶다는 겁니다. 저녁 무렵이었고, 응급으로 치료를 받고자 결국 모톨 응급실로 향했습니다.접수를 하고 리셉션 간호사에게 상태를 설명해야 했습니다. 이틀 전부터 눈이 아팠는데 지금 좀더 아파서 왔습니다. 그 소리를 들은 간호사 왈 "이틀전부터 아픈건 응급이 아닙니다." 그게 전부였습니다. 돌아가도 된다는 뜻이었습니다. 퇴짜였습니다. 역시 체코 병원이구나...솔직히 말하면, 그 순간 감정이 좀 복잡했습니다. 괜한 데 왔나 싶은 민망함, 그래도 아이가 심각한 건 아니구나 싶은 안도감, 그리고 이걸 굳이 밤에 왔어야 했나 하는 약간의 허탈함. 그것들이 뒤섞인 채로 아이 손을 잡고 주차장으로 나왔습니다.집에 돌아오니 아이는 언제 아팠냐는 듯 멀쩡해졌습니다. 아이들이란 참 그렇습니다.그런데 응급실을 나서면서 잠깐, 대기실을 한 번 돌아봤습니다. 우리는 퇴짜를 맞았지만, 그 안에 남아 있는 사람들은 달랐습니다. 실제로 아픈 사람들이었습니다. 수액을 맞으며 눈을 감고 있는 사람, 휠체어에 앉아 고개를 떨군 노인, 보호자인 듯 벽에 기대어 핸드폰도 보지 않고 그냥 멍하니 있는 중년의 남자.그 얼굴들이 자꾸 생각났습니다.우리는 평소에 정말 많은 것을 걱정하며 삽니다. 아이 문제, 돈 문제, 관계 문제, 앞날에 대한 불안. 그 걱정들이 사소하다는 말이 아닙니다. 실제로 무겁고 실제로 힘듭니다. 그런데 몸이 아프기 시작하면 정말로 아프기 시작하면 그 모든 것이 한순간에 뒤로 밀려납니다. 그리고 딱 하나만 남습니다.제발 이것만 나으면. 건강할 수만 있다면...그날 밤 응급실 대기실에 있던 사람들의 머릿속에는 아마 그것 하나뿐이었을 겁니다. 어제까지 그렇게 무겁던 걱정들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말입니다.퇴짜를 맞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, 이상하게도 감사한 마음이 들었습니다. 아이가 괜찮다는 것. 우리가 그 대기실 안에 머물지 않아도 된다는 것. 평소에는 당연하게 여겼던 것들이, 그날 밤만큼은 당연하게 느껴지지 않았습니다.건강은 있을 때 잘 보이지 않습니다. 없어지려는 순간에야 비로소 그것이 얼마나 큰 것이었는지 보입니다. 어쩌면 하나님은 이런 작은 사건들을 통해 우리가 잠시 멈춰서 돌아보게 하시는 건 아닐까요. 지금 내 곁에 있는 것들을, 너무 늦기 전에.응급실에서 퇴짜 맞은 날 밤이 오히려 감사한 밤이 되었습니다.
이원희 담임목사